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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게으른 나

날씨가 추워져서일까, 아니면 서른 즈음이어서일까
요즘 나는 게으름을 많이 피운다.

지난 가을에 자기계발을 위해 세워놓은 수많은 계획들과 지적허영심을 채우고자 사놓은 수많은 책들이 무색하게 먼지만 쌓여갔다.
남의 말에 거꾸로 행동하는 반골기질이 나 스스로에게도 향하고야만 것이다.
무언가를 하라고 스스로에게 절실히 외치지만, 무기력하다. 아니, 아무것도 하기 싫다.

분명 나는 게으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 게으름이 나태일까, 권태일까.

나태

나태(懶怠)
Pigritia

게으르고 느린 것,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
(적극적인 게으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행위)

나태는 게으름의 종류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부지런함, 근면과도 반대 개념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소극적 의미의 게으름이 아닌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거부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즉,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의미에서 나태는 신께서 내려주신 재능을 능동적으로 거부하고 태업하는 행위로 신께 반역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그래서 나태를 인간의 7대 죄악으로 정의했나보다.

remnants on desert
나태는 신에게 반역하는 행위, 죄악.

권태

권태(倦怠)
Ennui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적 가치관)

권태 역시 게으름의 한 종류이다.
그리고 권태도 나태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게으름의 형태에 속하는 것 같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
재밌는 점은 영어로 ‘The Seven-year Itch’라고도 한다. 결혼 생활 7년차에 권태로움을 느끼나보다.
그리고 Ennui의 어원이 Annoy와 같다는 점에서 권태는 ‘싫증’이라는 감정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한다.
여하튼, 어떤 일에 한 번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이 뭐가 됐든간에 하기 싫어진다.
권태감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일을 장기적으로 해야 할 경우 매우 지루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
권태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판에 박힌 일들이 루틴하게 반복되면서 느끼는 경우가 많다.다만, 원래부터 하기 싫었던 일에 권태감이 온다는 표현 사용은 부적절하다. 오히려 싫증난 것이 아닌 원래 싫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허무주의 철학의 대표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면 그 목표가 가치를 상실하고, 새로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시 약동하기까지의 공백을 권태라고 말한다.
즉, 우리 인간은 때때로 시련과 고난을 겪어 고통스럽지만 노력해서 그 고통에서 해소가 되면 또다른 고통이 찾아오기 전까지 권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노력하는 양에 비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은 순간적인 것일 뿐이고 그 후엔 기나긴 권태와 또다시 약간의 만족을 위한 기나긴 시련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생의 욕망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계속해서 고뇌의 굴레에 가둔다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우리 인생은 고통과 권태의 시계추 사이라는 것이다.

a man with white hair checking the vintage wall clock using stethoscope
우리의 인생은 고통과 권태의 시계추 사이다. – 쇼펜하우어 –

나의 게으름은 나태인가, 권태인가

‘굳이’ 프로젝트도 하고, 혼자 프로그래밍 공부와 영어 공부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도 매주 약속을 잡으며 한 동안 자발적으로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요즘 무기력함이 내 몸을 감싼다.
독서를 통해 지식을 채워가는 즐거움도, 운동을 통해 건강과 신체미를 가꾸던 보람도, 매주 굳이 새로운 것을 찾는 호기심도 모두 잃은 것만 같다.
마치 군대에서 처음 3km를 뛸때 내가 지금 어느정도 뛰었는지, 내가 뛰는 속도가 내가 원하는 시간 안에 들면서 체력적으로 잘 분배되었는지 모를때의 감정이다.

photo of person running on dirt road
숨은 죽을듯이 차오르고, 목표는 아는데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때 느끼는 불안감.

권태와 나태는 같이 오나보다.
권태가 먼저 찾아오니 나태도 뒤따른다.
기존에 하던 것들을 하기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어떠한 것도 하기 싫어졌다.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하기 위해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야한다는 부담감, 주변 지인들이 대학원, 자격증, 진급 등 각자 치열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나도 열심히 살아야하는데 현실은 게으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의 괴리감, 그리고 어느순간부터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나를 슬금슬금 잠식해오는 공허함에 젖어들어 스스로 내심 포기하고 내려놓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의 권태와 나태를 극복하기 위해 흔히 ‘시간이 답이다’라고들 한다.
하지만 난 오늘도 나의 게으름을 극복하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쓰면 나의 생각이 정리되고, 이어서 내가 가야할 길이 보인다.

rural road between grassy field
길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깊은 심해, 칠흙같은 어둠을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미지‘를 두려워한다.
아마 나의 권태와 나태는 내 미래에 대한 ‘미지’에서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underwater photography of deep sea
인간이 극도의 공포감을 느낄때는 바로 알지 못할 때이다.

그렇기에 더욱 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것이다.
수많은 독서로,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여러 인생에 대한 도전으로 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다보면 보이지 않던 내 미래의 해상도가 더욱 높아져 잘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지금의 나태와 권태가 어느정도 극복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더욱 높아지지 않을까 기대된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권태는 인생을 살면서 수시로 찾아오는 떼려야 뗄 수 없다. 권태는 인간의 죽음으로서 끝난다.)

나의 게으름은 이 글의 마침표와 함께 끝으로,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The Lazy Song – Bruno M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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